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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병 上 본문

[新蘭: SHINRAN, DORAN]

여름병 上

쾌난 2018. 8. 1. 16:41
서늘한 날씨임에도 실내에는 아직 더운 공기가 가시질 않았는지 삼삼오오 모인 교실 속에는 신기하리만큼 불필요한 수다 따윈 오가질 않았다. 얼굴에는 하나 둘 험한 인상을 그려내며 다수가 잠을 자거나, 멍을 때릴 뿐 공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온도계를 확인한다면 그다지 신기한 것도 아니었다. 적막함 뿐이 나도는 교실 속에서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샤프로 무언 갈 적는 소리와 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규칙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낡은 선풍기의 날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더 이상 소리가 아닌 소음을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선풍기가 신경 쓰여 보이는 녀석은 없었다. 더위 앞에 소리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며 나 살기 바쁜 모두가 그런 선풍기의 노동을 방관하고 있자면 유일하게 곧게 뻗은 힘없는 손은 선풍기의 선을 잡아당겨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마치 달달 떠는 선풍기의 모습이 오늘 아침에 본 그녀의 모습과 흡사하였기 때문에 드는 동질감일지도 모른다. 원망으로 가득 찬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개의치 않은 듯 제 자리로 돌아가 풀썩, 무기력한 기운을 내뿜으며 의자에 앉아 엎드렸다. 그의 헝클어진 뒤통수엔 그를 석연찮게 바라보는 시선 하나가 내려앉았다.





-





아직은 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여름. 개나 소도 감기에 안 걸린다는 그런 여름에 란은 감기에 걸리고야 말았다. 처음엔 가벼운 미열로 끄치는 듯 했으나 증세가 악화 되더니 결국 아주 독한 몸살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부활동을 끝마치고 샤워를 한 뒤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로 종종 하교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거까지 운 좋을 필요는 없잖아.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란의 이마에 물 적신 수건을 올리며 턱을 괜 채 핀잔을 늘어놓았다. 평소 운이 잘 따르는 란은 아침 일찍부터 저를 찾아온 신이치에게 남 일처럼 세상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이며-그래 봤자 애쓰는 게 훤히 다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여름에 감기라니, 역시 나 운도 좋지. 이 따위 어리석은 말이 신이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학교 가지 말까, "

란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그 말은 누워있던 란을 벌떡 일으키는데 효능이었다. 그건 안돼, 신이치. 제 팔을 잡아 밖으로 이끌려자 동그래진 두 눈과 함께 당황한 손길로 란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놀란 심정을 가다듬었다. 갈게. 가면 될 거 아냐.

더 있고 싶어 하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곗바늘에 란은 재촉을 하였고 그 성화에 못 이겨 한숨을 내쉬었다. 대야에 담긴 물에 식은 수건을 다시 적셔 란의 이마에 살포시 얹어두고선 그제야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아침도 흰죽으로 때운 란이 걱정되는 듯,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긴 와이셔츠의 걷어둔 소매를 내리고 답답함에 풀어헤쳤던 교복 넥타이를 매만지며 묻자, 뭐가 좋은 것인지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불어오는 바람과 푸른 광휘들이 어울려 내는 연주가 학생들의 들뜬 대화 소리와 함께 등굣길을 감쌌다. 평소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는 등굣길에는 언제 폈는지 모를 나무 한 그루가 활짝 피어나 있었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줄기가 유난히 짙은 색의 흰 꽃나무는 어딘가가 듬직해 보였고, 이 나무를 사람들은 살구나무라고 부르는 듯했다. 나무에 위태롭게 달린 꽃잎들은 울타리를 벗어나 바람을 타고 하나 둘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났다.

둘이 함께 걸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이렇게 장관인 날 아플게 뭐야. 투덜대며 여러 번 핸드폰을 들어 걱정과 함께 몇 자 적어내려 보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란에 방해되긴 싫었고, 헤어진 지 지금 몇 분이 지났다고 벌써 연락하는 것도 불편할 테니 말이다. 그를 마치 비웃는 듯 핸드폰 화면에는 10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 비춰보였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머니 속으로 핸드폰을 깊이 찔러 넣었다.

신이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등굣길이 이렇게 멀었었나. 2년간 등하교를 하며 밥먹듯이 오고 다녔던 길이 혹시나 잘못 들어선 건 아닐까,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학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개업을 준비하는 듯 낯선 편의점에 낯선 공원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은 갈 곳을 잃었다. 그동안 온갖 멋진 척이란 멋진 척은 다 해왔던 제 자신이 파노라마처럼 끊임없이 떠올랐다. 찾아줄 테니까. 당연 듯 약속처럼 내뱉었던 그 말이 어느 평범한 평일 오전, 한가로운 등굣길 위에서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인다.

다행히도 그런 무안 감이 얼마 가지 않아 이 길이 옳다는 걸 보여주듯 저 멀리 테이탄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란과 둘이서 등교하는 탓에 최근 편의점이 들어선 것도, 공원이 리뉴얼된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탐정의 관찰 깊은 습관은 그녀 옆에서라면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엔 기능을 상실하는 듯했다. 꽤나 넓어 보이는 편의점이 시야에 가득 찼다. 다음에 란과 함께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학교에 도착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하루를 보낸다. 무더위에 사건 또한 지레 겁을 먹은 듯, 오늘은 사건마저 일어나지 않았다.







유난히 다른 게 있었더라면 추운 교실 속에 종일 엎드려 있던 녀석뿐이었다. 오늘은 그 흔한 소노코의 짓궂은 장난조차 화를 내지 못하였다. 추위에 떨며 전기장판을 틀고서 턱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란을 생각하면 사치라 느껴질 만큼 교실의 공기는 너무나도 찼다. 낡아버린 반팔 와이셔츠를 대신한 긴 와이셔츠를 뚫고서 느껴지는 찬기에도 녀석은 더위를 먹은 사람 마냥 비실거렸다. 선풍기가 꺼진 교실 속 친구들 호랑이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동아줄에 매달린 형제 마냥 에어컨에 의존하였고, 그마저 신이치가 전원 버튼을 누르게 된다면 다음은 안 봐도 뻔했다.

이 모든 걸 가까이서 지켜본 소노코는 약간의 혼동을 느꼈다. 그녀가 알고 있기로는 란이 독한 몸살감기에 걸렸다는 것이지 신이치가 몸살감기에 걸렸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녹아버린 건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신이치가 괜한 엄살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노코는 싸늘한 시선과 함께 혀를 끌끌 찼다.

"왜 네가 다 죽어가는 거야?"

엎드린 채 손 끝으로 지우개를 굴리는 신이치를 보다 못한 소노코가 물었다. 공책 한 권 피지도 않은 깨끗한 책상에 공부한 흔적이라고는 도통 찾을 수 없는 말끔한 지우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언제나 소노코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신이치였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건지 미동조차 없었으며 녀석이 살아있긴 한 걸까, 검지 손가락을 뻗어 어깨 축지를 꾹 찌르는 소노코에 그제야 신이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했다.

"란 녀석 말이야. 괜찮을까."

학교를 오는 게 아니었는데.

붉게 달아오른, 바보같이 애써 괜찮은 척을 하던 그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신이치는 눈을 감고 책상에 고갤 묻었다. 땀으로 들러붙은 앞머리와 여러 번 비빈 탓에 충혈된 맑았던 눈. 뜨거웠던 그녀의 몸에 닿았던 그 촉감마저 가시지 않아 여전히 손등이 후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란의 고통이 어찌 된 일인지 그대로 신이치에게 돌아왔다. 그 고통은 찬기에 아파하는 란이 느끼는 고통과는 사뭇 달랐다. 머리가 지끈 아파 왔으며 손 끝부터 발 끝까지 힘이 닿지 않아 뭐 하나 해낼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다. 심해져만 가는 고통에 틈만 나면 자리에서 엎드려 습관처럼 잠을 청했으며 그 또한 악몽에 쫓겨 오래가지 못한 선잠이었다.

장난이었다면 좀 골려주려 했더니, 가까이서 본 녀석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눈 앞에 놓인 신이치의 약한 모습에 소노코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 마저 얼마 가지 않아 소노코는 배를 잡고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 기분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유급이 될 수 있는 제 자신을 뒤로한 채, 그저 란의 안부만 생각하는 녀석이 바보 같으면서도 부러웠다. 그녀는 싸움을 겨룰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 세계 시합에 나간 마코토와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째 되어가고 있었다. 곧 끝나 갈 시합에 분명 우승을 필두로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 뭐라 화를 낼지 계획해 나갔다. 물론 란은 화내지 말고 축하한다는 몇 마디만 하라곤 했으나 그런 방식은 화끈한 소노코에게는 딱히 끌리지 않는 것 같았다. 위로를 받아야 될 그녀가 축 처진 신이치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며 웃음을 미처 다 끝 치지 못한 상태에서 자리로 돌아섰다.







신이치는 그 잘난 두뇌 덕분에 간신히 유급을 피할 수 있었다. 반 년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음에도, 경찰과 모리네, 소수의 지인만 알고 있는 코난의 정체를 알 리 없는 학교 측에서는 녀석을 위해 선생님들이 이 악물고 출제한 시험을 다 맞추게 되었다는 이유로 1학년으로 유급되진 않았다.

이런 불리한 조건에 가만히 있을 리 없는 학교에선 그에게 약속 하나를 내걸었다. 돌아온 이 시간 후로부터 개근을 하지 않았을 경우, 즉 한 번이라도 결석을 할 경우엔 가차 없이 유급시켜버린다는 것이었다. 워낙 녀석의 결석 수가 졸업을 시켜줄 수 없을 정도로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전부 알고 있는 란은 어쩌면 그렇게 녀석을 재촉한 게 아닐까. 신이치라면 마음먹고 결석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후회와 더불어 위태로웠던 신이치는 끝맺음을 알리는 학교 종소리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청소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쿠도를 직접 깨우는 일은 없었다.





-





"쿠도 신이치?"

금방이라도 타 죽을 것처럼 녹초가 된 신이치는 방과후가 되고서야 자리를 뜨는 가 싶더니, 그대로 하교를 하고야 말았다. 선생님의 외침은 텅 빈 책상에 내려앉을 뿐,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녀석은 영리했다. 정규 수업이 아닌 방과후 수업이라면 유급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을 알고서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교실을 떠난 것이었다. 저 사랑꾼을 누가 말리리, 창문 너머 보이는 교문을 벗어나는 신이치의 뒷모습에 소노코는 고개를 젓는다. 어디로 향할지 목적지가 뻔히 보이는 그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도 들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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