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Monde
"우리, 그만할까." 본문
그녀는 도통 뜻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동이 튼 아침부터 달이 뜬 저녁까지, 함께 영화를 보고 또 밥을 먹었으며 언제나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하하 호호 얘기를 나누었던 신이치는 어느 평범한 날과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오늘따라 조금 차분하달까.
잠시 자리를 비운 신이치에 란은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서 스트로를 잡아 입에 갖다 댔다. 쪼르륵 빨대를 통해 빨아들인 아메리카노가 시럽을 넣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쓴 느낌이 깊게 와 닿아 인상을 찌푸렸다. 대화 상대도 없는 지금, 허공을 방황하며 맴돌던 그녀의 시선이 끝내 신이치가 대충 내빼고 간 빈자리에 닿았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의문들이 방금 전까지의 그의 모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신이치, 오늘따라 멍 때리는 일이 많아졌네. 많이 피곤한가? 생각에 잠길 즈음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신이치는 돌아와 입도 데지 않았던 다 식은 카푸치노를 벌컥 들이마셨다.
평소였다면 이야기의 꽃을 피워갔을 신이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는 란을 보는 건지, 듣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나사 빠진 로봇 마냥 삐거덕 거리는 일이 잦았다. 저기 신이치, 듣고 있어?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돼서야 그는 문뜩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란에 신이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듯 감춰지지 않는 표정과 함께 어색한 웃음을 내보였다.
“…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다가오는 시간 앞에 초조한 듯 그는 혼자만의 이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
“그만하자니,
뭐를? “
두서없이 말을 꺼내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탐정인 그의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이상할 만도 하다. 어디서나 제 의사를 똑똑히 펼쳐낼 줄 아는 그였으며 예외가 있다면 제 앞에서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뿐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목적어도 없이 운을 떼는 신이치에 란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조그마한 얼굴 속 예쁘게 자리 잡은 눈매는 다가올 후환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알 리가 없지. 어떠한 여지라도 주었다면, 네가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을지. 마주한 그녀의 동그란 눈망울 속으로 비춰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녀가 재촉을 하면 할수록 처량해져만 갔다.
과연 너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재촉할 수 있었을까.
제 속마음을 전혀 알 리가 없기에, 그러기에 재촉을 하는 그녀에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하고 있어 준다면 좋겠다만,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지 않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하는 건 한없이 잔인했다. 백지의 도화지에 검은 붓을 든 그는 겁이 많아 획을 그을 수 없었다. 한 번 물든 도화지는 지워낼 수 없었으며 검은 물감을 씻어내기 위해선 찢어 버리거나 뒷장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구겨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며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도화지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제아무리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끝내 하나로만 내려지는 답에 고통만 늘어나는 신이치였다.
그의 머리칼을 헤쳐 놓을 만큼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에 란은 맞잡고 있던 신이치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혼자 장갑 끼기 뭐 한 나머지 그에게도 한쪽을 권유했으나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려 결국 차가울 그의 손을 감싸 잡기로 했다. 남은 손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를 정리하며 두 볼이 빨개진 그녀는 춥다 못해 따가운 추위 속에서도 신이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쳐 보이지 않았다. 볼이 시리다 느껴질 때면 목에 걸친 빨간 목도리를 끌어올려 얼굴을 감쌌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없이 정적이 흐름을 타고 흘렀으며, 여러 번 달싹이는 매 마른 그의 입술 틈 사이로는 그녀가 기다린 대답이 아닌 뿌연 연기만 뿜어져 나왔다. 둘이라서 따듯했던 겨울이 사실은 이렇게 시렸던 것일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핑계를 댈까.
하루라도 더 보고 싶은 그의 모순된 욕망 속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피어난 아주 작은 핑계였다. 변명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제 앞에 닥쳐 올 현실을 피하고 싶어 스스로 갖다 붙인 핑곗거리일 뿐이니까. 하루만, 딱 하루만. 그의 어리석은 변명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결국 올해 첫눈도 둘이 함께 맞이하게 되었다. 두 눈에 반짝이는 별을 담고서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본 란을 머릿속에서 지우라고는 자신 없는 일이었다.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 송이 아래 맞추었던 입술은 결국 이별 후 회자될 아플 추억만 만들었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이 침을 삼키면 함께 삼켜질 거라 생각했는데, 다 무용지물이었다. 어떻게 서든 오늘 그녀에게 내뱉어야지 그러지 않는 이상 이 고통은 오랫동안 입안에 감돌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그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 같았다.
“… 란.”
잔인하기 짝 없는 그 말은 선뜻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수없이 맞췄던 그 입술로 수없이 불러봤던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늘 찾았던 그 이름이 오늘만큼은 구슬프게 들려온다. 목구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아내려 숨을 깊게 들이쉰다. 매서운 칼바람에 차가운 공기가 흘러 들어와 기도에서 탁하고 맺혀 옥죄여오는 기분이다. 숨 쉬는 것조차 이젠 버거운 존재였다.
“그만 만나자.”
참 책임감 없는 짓이었다. 모두 떠넘겼다. 더 이상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결국 내뱉고야 말았다.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저를 괴롭혔던 그 말을 내뱉으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썩 후련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시를 삼키기 위해 들이부은 물에 더욱 반항을 하듯 날카로운 가시들로 제 목구멍을 쿡쿡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검은 물감은 그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백지의 도화지가 아니었으며, 도화지 위에 멋대로 갈긴 검은 붓을 두고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화지가 울먹일 만큼 깊게 획을 그은 채 도화지가 찢겨 구겨지든, 새로운 뒷면을 사용하든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서 그가 숨을 쉬기 위해 택한 행동은 한없이 잔인했고 이기적이었다.
“… 신이치. 이런 장난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란.”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오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그를 올려보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을 내뱉는 마냥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장난이겠거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꺼낸 란은 이쯤이면 신이치는 웃어 보이며 농담이었다고 제게 사과를 할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늘 기분 나빠하는 제게 사과를 하며 져주던 신이치였으니까. 그런 신이치에 란은 토라질 생각까지 하였지만 머릿속에 그린 시나리오와는 달리 진지하게 두 눈을 또렷하게 맞춰오는 신이치였고 그 눈빛을 읽어낸 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이치는 아무리 장난이어도, 헤어지잔 말을 쉽게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네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내일 얘기하자.”
그녀가 도망치듯 맞잡았던 손을 내빼려자 예상대로 그는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맞잡아 온 손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 같았다. 추울까 걱정이 되어 그가 선물한 덩어리 장갑으로 맞잡았던 그 손은, 이 순간을 회피하려 하는 란을 붙잡아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대답, 아니 결론을 끝맺기 위해 도망갈 수 없게 잡아둔 수갑과도 같았다. 순탄하였던 하루의 끝에 서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무슨 심정을 가진 체 제게 이러는지 파악할 리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뚜렷이 맞춰오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볼 뿐, 그가 원하는 대답도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울컥 가슴속에 요동을 피우며 잔잔할 줄 모르던 파도는 휘몰아치기 시작하였고 끝내 턱 끝까지 차오르고야 만다.
“나한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내려앉은 그의 눈길이며 닿았던 손길이며, 겨울이란 걸 자각조차 할 수 없게끔 한없이 따듯했던 둘만의 시간을 보내 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그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여태까지 이 모든 건 다 연기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일까. 한 시간 전부터? 입을 맞췄던 첫눈이 오기 전부터? 아님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또렷이 마주쳐오는 눈과는 달리 신이치의 입술은 여러 번이고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치아로 세게 짓누른 입술은 버티다 못해 얇은 피부 사이로 피가 맺혔다. 텔레파시 같은 건 믿지 않는 그는 이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마음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고 외쳤다.
“……질렸어.”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아주길. 그렇지만 한 치의 의심 없이 내 거짓을 믿어주길.
생각해보면 오늘따라 조금 차분하달까.
잠시 자리를 비운 신이치에 란은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서 스트로를 잡아 입에 갖다 댔다. 쪼르륵 빨대를 통해 빨아들인 아메리카노가 시럽을 넣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쓴 느낌이 깊게 와 닿아 인상을 찌푸렸다. 대화 상대도 없는 지금, 허공을 방황하며 맴돌던 그녀의 시선이 끝내 신이치가 대충 내빼고 간 빈자리에 닿았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의문들이 방금 전까지의 그의 모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신이치, 오늘따라 멍 때리는 일이 많아졌네. 많이 피곤한가? 생각에 잠길 즈음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신이치는 돌아와 입도 데지 않았던 다 식은 카푸치노를 벌컥 들이마셨다.
평소였다면 이야기의 꽃을 피워갔을 신이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는 란을 보는 건지, 듣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나사 빠진 로봇 마냥 삐거덕 거리는 일이 잦았다. 저기 신이치, 듣고 있어?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돼서야 그는 문뜩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란에 신이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듯 감춰지지 않는 표정과 함께 어색한 웃음을 내보였다.
“…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다가오는 시간 앞에 초조한 듯 그는 혼자만의 이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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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자니,
뭐를? “
두서없이 말을 꺼내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탐정인 그의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이상할 만도 하다. 어디서나 제 의사를 똑똑히 펼쳐낼 줄 아는 그였으며 예외가 있다면 제 앞에서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뿐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목적어도 없이 운을 떼는 신이치에 란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조그마한 얼굴 속 예쁘게 자리 잡은 눈매는 다가올 후환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알 리가 없지. 어떠한 여지라도 주었다면, 네가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을지. 마주한 그녀의 동그란 눈망울 속으로 비춰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녀가 재촉을 하면 할수록 처량해져만 갔다.
과연 너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재촉할 수 있었을까.
제 속마음을 전혀 알 리가 없기에, 그러기에 재촉을 하는 그녀에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하고 있어 준다면 좋겠다만,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지 않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하는 건 한없이 잔인했다. 백지의 도화지에 검은 붓을 든 그는 겁이 많아 획을 그을 수 없었다. 한 번 물든 도화지는 지워낼 수 없었으며 검은 물감을 씻어내기 위해선 찢어 버리거나 뒷장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구겨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며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도화지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제아무리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끝내 하나로만 내려지는 답에 고통만 늘어나는 신이치였다.
그의 머리칼을 헤쳐 놓을 만큼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에 란은 맞잡고 있던 신이치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혼자 장갑 끼기 뭐 한 나머지 그에게도 한쪽을 권유했으나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려 결국 차가울 그의 손을 감싸 잡기로 했다. 남은 손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를 정리하며 두 볼이 빨개진 그녀는 춥다 못해 따가운 추위 속에서도 신이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쳐 보이지 않았다. 볼이 시리다 느껴질 때면 목에 걸친 빨간 목도리를 끌어올려 얼굴을 감쌌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없이 정적이 흐름을 타고 흘렀으며, 여러 번 달싹이는 매 마른 그의 입술 틈 사이로는 그녀가 기다린 대답이 아닌 뿌연 연기만 뿜어져 나왔다. 둘이라서 따듯했던 겨울이 사실은 이렇게 시렸던 것일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핑계를 댈까.
하루라도 더 보고 싶은 그의 모순된 욕망 속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피어난 아주 작은 핑계였다. 변명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제 앞에 닥쳐 올 현실을 피하고 싶어 스스로 갖다 붙인 핑곗거리일 뿐이니까. 하루만, 딱 하루만. 그의 어리석은 변명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결국 올해 첫눈도 둘이 함께 맞이하게 되었다. 두 눈에 반짝이는 별을 담고서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본 란을 머릿속에서 지우라고는 자신 없는 일이었다.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 송이 아래 맞추었던 입술은 결국 이별 후 회자될 아플 추억만 만들었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이 침을 삼키면 함께 삼켜질 거라 생각했는데, 다 무용지물이었다. 어떻게 서든 오늘 그녀에게 내뱉어야지 그러지 않는 이상 이 고통은 오랫동안 입안에 감돌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그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 같았다.
“… 란.”
잔인하기 짝 없는 그 말은 선뜻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수없이 맞췄던 그 입술로 수없이 불러봤던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늘 찾았던 그 이름이 오늘만큼은 구슬프게 들려온다. 목구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아내려 숨을 깊게 들이쉰다. 매서운 칼바람에 차가운 공기가 흘러 들어와 기도에서 탁하고 맺혀 옥죄여오는 기분이다. 숨 쉬는 것조차 이젠 버거운 존재였다.
“그만 만나자.”
참 책임감 없는 짓이었다. 모두 떠넘겼다. 더 이상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결국 내뱉고야 말았다.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저를 괴롭혔던 그 말을 내뱉으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썩 후련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시를 삼키기 위해 들이부은 물에 더욱 반항을 하듯 날카로운 가시들로 제 목구멍을 쿡쿡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검은 물감은 그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백지의 도화지가 아니었으며, 도화지 위에 멋대로 갈긴 검은 붓을 두고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화지가 울먹일 만큼 깊게 획을 그은 채 도화지가 찢겨 구겨지든, 새로운 뒷면을 사용하든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서 그가 숨을 쉬기 위해 택한 행동은 한없이 잔인했고 이기적이었다.
“… 신이치. 이런 장난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란.”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오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그를 올려보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을 내뱉는 마냥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장난이겠거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꺼낸 란은 이쯤이면 신이치는 웃어 보이며 농담이었다고 제게 사과를 할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늘 기분 나빠하는 제게 사과를 하며 져주던 신이치였으니까. 그런 신이치에 란은 토라질 생각까지 하였지만 머릿속에 그린 시나리오와는 달리 진지하게 두 눈을 또렷하게 맞춰오는 신이치였고 그 눈빛을 읽어낸 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이치는 아무리 장난이어도, 헤어지잔 말을 쉽게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네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내일 얘기하자.”
그녀가 도망치듯 맞잡았던 손을 내빼려자 예상대로 그는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맞잡아 온 손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 같았다. 추울까 걱정이 되어 그가 선물한 덩어리 장갑으로 맞잡았던 그 손은, 이 순간을 회피하려 하는 란을 붙잡아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대답, 아니 결론을 끝맺기 위해 도망갈 수 없게 잡아둔 수갑과도 같았다. 순탄하였던 하루의 끝에 서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무슨 심정을 가진 체 제게 이러는지 파악할 리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뚜렷이 맞춰오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볼 뿐, 그가 원하는 대답도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울컥 가슴속에 요동을 피우며 잔잔할 줄 모르던 파도는 휘몰아치기 시작하였고 끝내 턱 끝까지 차오르고야 만다.
“나한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내려앉은 그의 눈길이며 닿았던 손길이며, 겨울이란 걸 자각조차 할 수 없게끔 한없이 따듯했던 둘만의 시간을 보내 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그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여태까지 이 모든 건 다 연기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일까. 한 시간 전부터? 입을 맞췄던 첫눈이 오기 전부터? 아님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또렷이 마주쳐오는 눈과는 달리 신이치의 입술은 여러 번이고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치아로 세게 짓누른 입술은 버티다 못해 얇은 피부 사이로 피가 맺혔다. 텔레파시 같은 건 믿지 않는 그는 이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마음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고 외쳤다.
“……질렸어.”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아주길. 그렇지만 한 치의 의심 없이 내 거짓을 믿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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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병 上 (0) | 2018.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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